채홍정/시인
채홍정/시인

자아실현이란 말 자체가 자기가 지닌 최대한의 능력 개발이고, 최대한의 능력 사용이며, 잠재 능력과 소질의 충분한 발휘라고 생각한다. 식물들까지도 제가 좋아하는 습기 있는 쪽으로 뿌리를 뻗어 나가고, 제가 즐기는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가지와 덩굴을 뻗어 나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삶은 곧 이고득락의 연속적인 추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려면 현실과 이상을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상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게 하여야 한다. 현실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상으로 바꿔 가야 한다. 그리하려면 현실과 이상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현실을 등한시하지 않되 현실에 급급하지도 말고, 이상을 놓치지 않되 지나친 이상주의에 기울지도 않는 중도中道의 묘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물론 인생에는 즐거운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다. 그 어떤 즐거움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못하는 법이어서 마침내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그 한때의 즐거움이 끝나면 다음 괴로움이 다가온다. 이처럼 인생은 괴로움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 고달픈 길이다.

욕구는 자기의 능력으로서 얻을 수 있는 정도까지의 바람을, 욕망은 자기의 능력으로 미칠 수 없는 바람을 가르친다. 그리고 희구는 욕구와 욕망을 모두 포함하기보다 큰 개념이다. 문제는 우리의 희구양希求量이 언제나 소유보다 크다는 데 있다. 우리는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가난해진 기분이 드는 것이다.

설사 황금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해도 욕망을 다 만족 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은 황금 장맛비가 안 오나? 이제 황금은 지겨우니까 다이아몬드 비가 왔으면 좋겠다!”라는 식이다.

완전한 만족은 소유의 길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희구양을 줄여 적은 것에 만족할 수 있을 때, 즉 안으로의 길에서만 얻어지기 때문이다.

“마음(희구양)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으뜸가는 재산이다. 욕망을 부숴야만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은 마음 안에 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문은 패망으로 가는 길이다. 남이 내 뺨을 치거든 오른 뺨을 돌려 대고, 남이 나에게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까지 동행하라,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등의 명언을 되새김하면 욕망을 줄이는 능력 개발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능력이 소유를 결정하고, 소유가 만족을 준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욕망은 우리의 잠재 능력을 가로막아 그 개발과 발휘를 제한한다.

욕망을 줄여 욕구만으로 사는 것은 자기 사랑의 길이요, 욕망이 많아 그에 이끌려 사는 것은 자기를 해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욕망을 줄여 욕구 차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안이 될 때, 진정한 자기 사랑의 길인 것이다.

사람들은 즐거움에 집착하여 머물게 하려고 하고, 괴로움에 대해서는 한사코 물리치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는 문제가 줄어들지 않으며, 욕망은 더욱 늘어나고, 지혜는 더욱더 어두워진다. 즐거움을 머물게 하려면 괴로움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지 말아야 하며, 괴로움을 거부하려면 즐거움에 대해서도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즐거움, 괴로움의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이 삶이다. 삶은 즉, 이처럼 즐거움, 괴로움의 시소게임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 해탈, 열반이라는 참답고 영원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명상은 세속적인 즐거움, 괴로움을 둘 다 버려 초월하는 데서 시작된다. 욕망이 집착을 낳고, 집착에는 즐거움을 붙들려는 집착과 괴로움을 한사코 거부하려는 두 형태가 있음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앎이 지혜이다. 지혜는 일반적으로 지혜, 즉 지식과는 의미가 다르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지혜이고, 자신이 아는 것이 지식이다.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은 지혜이고, 사물에 대해 아는 것은 지식이다.

행불행의 근본 법칙을 아는 것은 지혜이고, 지엽枝葉 법칙을 아는 것은 지식이다. 직접 보아서 아는 것은 지혜이고, 간접적으로(책, 가르침 따위) 아는 것은 지식이다. 분명하게 아는 것은 지혜이고, 애매하게 아는 것은 지식이다. 세밀하게 아는 것은 지혜이고, 둔탁하게 아는 것은 지식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성취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즐거움을 얻게 된다는 말이 이고득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바이다.

알아차림은 깨달음이라는 놀라운 경지를 가능케 해주는 신비한 정신력인 것이다. 알아차림의 정신력으로서 인류 최고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과거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반성이고, 현제를 가장 충실하게 사는 것이 미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준비이다.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조화롭게 사는 것이기도 하다.

슬픈 몸, 마음의 현상으로부터 해탈이 모든 얽매임을 다 파괴해 버리면 이제 더 이상 마음의 괴로움은 없는 것이다. 열반은 빔空이요, 자취 없음, 그는 다만 해탈만이 목적이니 새가 허공을 날아가도 자취가 없듯, 그가 가는 길에도 자취가 없다.

마음, 숲 속, 골짜기, 언덕,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있으니, 원한을 품을 만한 자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폭행하는 자들을 용서와 평화로 대하며, 집착된 자들 속에서도 집착이 없으니, 과거, 현재, 미래에 얽매지 않아 물질의 소유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만다.

시간에 얽매임이 없어 집착에서 벗어났으니 두려움 없는 승자요, 영웅, 위대한 스승이며, 욕망의 정복자,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청정한 진리를 깨달았으니 비구름 일으켜 천둥이 울고 새가 나는 공중에 비가 내리니, 그는 이보다 더 나은 즐거움을 알지 못 하리, 각양각색의 관목 더미에 묻힌 강가에서 꽃에 휩싸인 마음 그는 이보다 즐거움을 알지 못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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