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상선 수필가

밤 10시가 다 된 시각에 전화가 왔다. 늦은 시각이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각을 다투는 전화였다. 성모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시던 수양모께서 임종직전이라 가족들이 대기 중이라는 전화였다.

 

수양모께서는 날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신 분이셨다. 대학 다닐 때부터 인연이 되어, 당신 가족 이상으로 챙기시고 사랑해 주셨기에 지금까지 생모처럼 따르고 존경했던 분이심에 틀림없었다.

 

임종직전이란 말에 다급하여 서둘렀다. 단걸음에 뛰어나가 승용차 시동을 걸었다. 운전대 잡자마자 빛의 속도로 달렸다. 서둘다 보니 시내버스와 충돌할 뻔한 위기의 상황도 있었다. 당황하여 서두른 것이 문제였다. 주차를 하고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중환자실 앞에 도착했다.

 

4남매 중 3남매가 임종 대기 중이었다. 장녀, 큰 아들, 차녀, 셋이 불안초조로써 맥질한 얼굴들이었다. 베트남에 있는 차남만 예기치 않은 뜻밖의 변고의 소식인데다 코로나로 입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얘길 들어보니 코로나로 인해 다른 사람은 중환자실에 못 들어가고 수양모가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과 장남만이 사정하여 임종 임박에 드리는 기도를 방금 전에 마쳤다는 거였다. 그리고 장남이 어머니를 꼭 안아드려 마음을 편하게 해드렸다고 했다.

 

비정한 코로나로 부모님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는 자식들, 가족들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불과 4, 5 m 거리를 두고 중환자실 문 하나가 대칭축이 되어, 안에서는 다급한 환자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가족들을 초조하게 하고 있었고, 문밖엔 마음을 졸이며 긴장하고 있는 자식들의 애 타는 모습들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 가시는 부모님 얼굴마저 보지 못하게 하는 코로나였다. 비정도 이런 정도라면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내 마지막 가시는 임 뵈오려 달려갔는데 출입통제로 뵙지 못하고 중환자실 문 앞에서 몇 시간을 마음 졸이다가 돌아왔다. 위기의 밤이 지났다. 초조 긴장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오후 5시경에 소천하셨다는 부음이 전해왔다. 달려갔다. 생전에 뵈어야 할 얼굴을 영정 사진으로 대하니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한의 넋두리가 눈물로 쏟아지고 있었다.

 

고인이 되신 수양모는 향년 92세로 생을 마치셨지만 돈독한 기독교 신자이셨다. 교회 권사로서도 칭송을 받고 신심이 깊으신 분이셨다. 그리하여 당대는 물론이고 2, 3, 4대에 이르기까지 가족 모두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매사에 신경을 쓰셨다. 심지어는 당신께서 입고 가실 수의도 자식들이 용돈 드린 것을 모으고 아끼시어 만든 거였다.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극진하고 선하게 사시어 하늘이 내려주신 천사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분이셨다.

 

내 1주일에 한 편씩 쓴 수필을 모아 제2수필집을 냈다. 그 수필집을 영전에 바쳤다. 생전에 보여드리려던 책인데 영전에 바치는 글이 되고 말았다. 국화꽃 한 송이를 헌화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에, 넋두리 같은 하소연을 흐느낌의 부르짖음으로 토해냈다.

 

고인이 되신 수양모는 내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세월을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신 분이셨다. 내가 2009년도 TJB 교육대상을 받을 때 방송국에 오셔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모습이며, < 방은 따뜻하게 하고 지내니 ? 먹는 것은 굶지 않고 잘 챙겨 드느냐? 반찬은 뭘 먹고 사는 거냐? > 하시며 사궁지수가 된 날 안타까운 마음으로 끔찍이도 챙기시던 분이셨다.

 

내가 종종 드리는 문안전화가 늦거나 거르는 때가 있으면, 손수 전화를 하시어 안부를 묻는 분이셨다. 날 낳아 주신 분은 아니었지만 생모의 푸근한 정을 느끼게 하고서도 남는 분이셨다. 2년 전에 낸 처녀작 수필집‘발신인 없는 택배’를 들고 갔을 때에도 그처럼 좋아하시던 모습이 날 어렵게 하고 있다. 울컥했다. 눈물이 주루룩 얼굴을 적셨다. 만감이 교차하여 넋두리 같은 말을 내지르며 영전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불교경전 법화경에 나오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란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만나는 사람은 헤어져야 할 것이 정해져 있고, 헤어진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는 말이니, 살아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과도 통하는 말이라 하겠다. 만나면 헤어지게 되는 것이 세상사 돌아가는 섭리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남편, 부인, 자식, 가족, 명예, 부귀영화를 영원히 움켜쥐고 싶지만 때가 되면 하나 둘 곁을 떠난다는 뜻이니 인생 일장춘몽을 실감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인생살이가 한 순간의 흐름이니, 집착하여 붙잡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바로 괴로움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평생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신 수양모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나는 사흘간 빈소를 지키고 장지까지 따라갔다. 코로나가 무서워 장례식장을 피하는 사회적 분위기인데도 많은 조문객이 다녀갔다. 배달된 화환과 조기(弔旗)만 해도 70개 정도에 다다랐으니 상주된 4남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유대관계 속에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4남매가 대견스럽고도 자랑스러워 보였다.

 

조문객 중에는 상주의 친구로서 폐암 수술 환자도 있었는데,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조문을 온 분이었다. 친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슬픔을 같이하려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마음을 파고드는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장지까지 따라와 시종 상주와 슬픔을 같이하고 격려와 위로로 힘이 돼 주는 상주의 친구들이 예사로 보이질 않았다.

 

진정한 친구란 평상시 같이 만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희희낙락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곤궁한 상황에 처했을 때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희로애락 중에서도 특히 애사에 슬픔을 같이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으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생전에 드릴 수필집이 영전에 바치는 글이 되다니 ! ’

 

영정 사진을 앞에 놓고 바라보는 마음이, 모든 게 그리움이요 서글픔이며 뉘우침뿐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깨달음이었지만,

 

      ‘ 있을 때 잘해 !’란

 

평범한 이 한 마디가 왜 이리 가슴을 후벼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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