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아가고

▲ 김지안/ 수필가

여동생이 사는 한적한 아파트 정문 앞에 이따금 새를 파는 청년이 왔다.

갸름하게 생긴 얼굴, 꽃미남이다. 적극적으로 손님을 끄는 법도 없이 차 곁에 새장을 주르륵 꺼내놓고 책을 읽었다.

지나가던 주부들, 아이들, 아이의 고사리손에 이끌린 아빠들이 기웃거렸다. 여동생은 거기서 '금정조'를 샀다. 아주 조그맣고 알록달록 예쁘게 생겼다. 외모를 보고 샀더니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조용해서 키우기 좋은 새'라는 것이다. 이런, 새란 예쁜 소리로 지저귀어야 하는데.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동생의 집 베란다에서 햇빛 아래 한가롭게 앉은 새 장수를 내려다봤다. 새소리가 10층까지 들렸다. 그날 저녁 꼬맹이가 토끼 사달라고 졸라 부랴부랴 가봤더니 그는 새장을 챙겨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며칠 후 들렀더니, 마침 새 파는 청년이 와 있었다.

분홍색 -꼬맹이가 좋아하는 색- 새장에 들어 있는 '십자매' 한 쌍을 사 왔다. 그 청년은 새 값을 절대 안 깎아준다. 십자매는 부부의 금실이 좋고, 남의 새끼를 잘 키우는 새라고 한다. 새를 기를 때 십자매를 일단 대모로 삼으면 그 조그만 체구로 아주 자알 키운다는 것이다. 마음에 든다.

저희끼리 제법 고운 소리로 우는 새를 데려다 두니까 어쩐지 생기가 느껴졌다. 꼬맹이가 이름을 '똘똘이'와 '사랑이'로 지어줬다. 솜을 뜯어서 새장에 넣어줬더니 어느새 저희 둥지에 옮겨두었다. 폭신하겠다.

이른 아침, 꼬맹이가 흔들어 깨웠다.

"엄마. 새 봉지(둥지)에 계란이 두 개 들어 있어."

새를 가져다 둔 얼마 후부터 둘 중 한 마리가 자꾸만 뚱뚱해지더니, 알을 낳았나 보다. 후다닥 뛰어가서 보니 과연 조그마한, 똑 계란처럼 생긴 알을 두 개 낳았다.

둘이 둥지 안에 들어앉아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저희에게 무슨 볼일이 있나 하며 쳐다보았다.

방해될까 봐 물과 모이만 갈아주고 들어왔다.

외모로 봐서는 새 두 마리 중 누가 수컷이고 암컷인지 새 장수조차 구별하기 어렵다.

그런데 둘 중 하나는 다소곳하고 겁이 많다. 다가가면 얼른 둥지로 숨어든다. 나머지, 훨씬 활발한 한 마리는 둥지 곁에 버티고 앉아 누가 오기만 해봐라 하는 태세다.

여성이 가장이 되는 경우가 늘고 남자 주부도 생기는 세상이긴 하지만 모든 수컷의 팔자란 저런 것인가 속으로 웃음이 난다.

알 두 개를 낳은 다음 날 보니, 알이 세 개로 늘어났다.

매일같이 둘이서 알을 품었다. 나도 덩달아 숨죽이며 아기 새가 과연 저 조그만 알에서 언제 나올 것인가 기대를 품고 기다렸다. 꼬맹이도 아침마다 들여다보고는 "엄마, 아기 새가 아직도 안 나왔어." 보고를 했다.

다음 날 아침 들여다보니 노른자가 마른 채 깨진 알 두 개를 바닥에다 버려 놓고, 남은 하나를 열심히 품고 있었다. 새로운 새장을 또 사야겠네. 어떤 디자인을 살까 미리 궁리했더니 아쉽다. 하나 정도는 부화하면 좋으련만.

새는 강아지처럼 체온을 나누진 않지만 볼일을 아무 데나 보거나, 닦아주거나 목욕을 시킬 일이 없다. 저희들의 일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는 것 같다. 모이와 깨끗한 물을 챙겨주고 이따금 새장 청소를 하는 외에 할 일이 없다. 무엇보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감정 교류가 되지 않는 동물을 키우는 것은 곤혹스러우리라고 생각해왔다.

새장 속 저희들의 생활이 엄연한 새와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한 공간에서 사이좋게 살았다. 가만 보면 새의 성미와 내 성미는 닮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10여 년이 지난 이제 동생도 새도 없다.

젊고 아름다운 동생은 암을 앓다 새처럼 창공으로, 자유로 날아갔다. 십자매 한 쌍도 창공으로, 자유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얼마나 둘의 사이가 좋았던지 한여름 가마솥더위에도 깃털로 덮인 어깨를 꼭 붙이고 앉아 무엇을 보는지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알을 많이 까면서도 새끼는 한 마리도 두지 않았고, 제 수명보다 오래 살았다.

꼬맹이는 처녀가 되었다. 강아지를 기르자 고양이를 기르자 토끼를 기르자 조르다가 죽음에 기겁을 한 내가 고개를 내저었더니 제 방에서 루카를 키우고 있다. 외동아이여서 더욱 조르는 것일까. 그러나 꽃 외에는 어떤 생명체도 들이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이불 속에 안고 자던 강아지가 쥐약 먹고 죽은 것을 마음 아프게 바라본 기억. 토하도록 비눗물을 먹였으나 소용없었다. 그토록 껴안고 싶어 안달해도 매정하게 얼굴을 할퀴곤 뒷산으로 날듯 사라져버리던 고양이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한 생명을 사랑하고 그 생명과 사랑을 나누다 이윽고, 그 생명의 죽음을 지키는 것. 그것은 무거운 일, 나의 사랑이 갈 곳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는 일이다.

흔히 키우는 개와 고양이 외에 어류, 파충류, 심지어 애벌레를 키우는 이들도 있다.

딸이 키우는 루카는 화분에 붙어 들어온 민달팽이다. 민달팽이는 독이 있어 맨손으로 만져선 안 된다. 암수한몸이다. 무심한 나의 눈에 암컷 수컷도 따로 없는 민달팽이는 미물에 불과하다.

“양배추를 주다가 질릴 것 같아 상추를 넣어줬더니 반이나 뜯어먹고 초록색 똥을 이만큼 누었어, 우리 루카가. 하하!” 징그러운 민달팽이를 마치 제 새끼인 양 ‘우리 루카’라며 사랑한다. 루카가 이따금 더듬이 같은 눈으로 자기를 진지하게 바라본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깜짝 놀랐다. 민달팽이를 사랑하는 이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이 존재할 줄이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유명한 명문장은 모든 사랑의 관계에 적용되며, 반려동물과의 관계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부지런한 사랑의 달인들이다. 그 놀라운 ‘사랑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E.T가 지구에 나타나도 거리낌없이 손가락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이다.

알을 깨고 나온 루나가 상추 위에서 곰실거린다. 루카의 새끼다.

새봄이 와서…나의 상처에도 새살이 돋기를 기다린다. 생명체와 기껍게 사랑하며, 그를 감당할 수 있는 내공을 차곡차곡 쌓아야겠다.

- 죽음보다도, 죽음의 공포보다도 강한 것. 사랑의 내공을.(트루게네프의 산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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