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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학 여행기이 득 주/ 수필가
  • 김용복 극작가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0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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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득주 수필가

1967년 9월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흙먼지 날리던 신작로를 걸어 7km 떨어진 학교로 갔다.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 선생님을 따라 10여 명이 간 곳은, 신평시장 변두리에 있던 선생님의 조그만 전셋집.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하니 우리 집에서 같이 자자.’고 하셨다.

처음 들어가 보는 선생님 댁은 방 2칸에 부엌 하나 딸린 조그만 한옥이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사모님을 보니, 시골에서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 새까만 우리 엄마와는 다르게, 얼마나 젊고 이쁘시던지! 과일이며 과자며 그때 시골에선 엄청 귀한 것들을 내주시며, 많이 먹으라고 권해서 염치도 없이 다 먹어 버렸다.

우리끼리 떠들며 놀다 밤 10시쯤 되니, 선생님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남자애들은 선생님과 윗방에서 여자애들은 사모님과 안방에서, 선생님 댁 아이들과 동침을 하였다.

이불속에서 옆 친구와 소곤소곤 떠들다 잠이 들었는데, 조금 이따 보니 사모님이 벌써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양동이에서, 더운물을 떠다 주시며 세수를 하라고 했다.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무섭기만 하던 선생님이 이렇게 인자하실 줄이야! 도란도란 모여 앉자 사모님이 퍼 주는 공깃밥을 먹고 있는데, 멀리 서울까지 가려면 배고플 테니 많이 먹으라며 자꾸만 더 퍼 주셨다.

배부르게 아침밥을 먹고 사모님의 배움을 받으며 학교에 오니, 운동장은 아직도 컴컴하기만 했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들이 언제 달려왔는지, 교무실 앞 운동장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버끌 했다.

잠시 후 우리를 태우고 갈 충남교통 빨간 버스 2대가 학교 앞에 도착했다. 반별 인원 점검 후 교장 선생님의 환송 연설을 들은 후,우리는 차에 올랐다.

버스 의자가 모자라 가운데 통로에 나무 의자를 들여다 놓았고, 털털거리는 비포장 신작로 길을 달려가도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한 달 전 선생님이 초등학교 생활의 기념이 될 수학여행을 서울로 가게 되었다면서, 전체인원이 같이 갈 수 있도록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600원씩 타 오라고 하셨다.

이후 선생님은 종례 시간마다 수학여행 갈 사람 인원 파악을 하셨는데, 처음엔 10명도 안 나왔다. 예상보다 간다는 사람이 너무 적으니, 못 가는 사람은 방과 후에 남아 있으라 했다.

청소가 끝나고 전체 65명 중 55명이 남이 있으니 한 명씩 앞으로 나오란다. 드디어 내 차례, “아버지가 안 보내 주시니?” 그래서 내가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안 된대 유…. 전에 고모들도 다 안 갔다고 유….”

그때 나는 장남이라서 막내 고모하고 학교를 같이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후회한다. 학교 졸업하면 남는 게 이것밖에 없어, 할아버지한테 다시 잘 말씀드려 봐.” 하셨다. “예” 하고는 책보를 걸쳐 메고 힘차게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는 분위기가, 얘기해 봐야 할아버지한테 혼나기만 할 것 같아 얘기도 못 하고, 숙제만 하고 일찍 잤다.

며칠 후 선생님은 “큰일났다. 버스 2대 예약했는데, 인원이 반도 안 되니! 오늘은 1시간 먼저 끝내 줄 테니까, 집에 가서 엄마. 아빠 일 좀 도와 드리고,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저녁 먹을 때 얘기해 봐, 수학여행 꼭 보내 달라고… 알았지!” 우리는 그저 한 시간 일찍 끝내고 집에 간다니, 마냥 신이 났다.

집에 와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음에도 우리 집은 감감소식, “큰일 났네. 선생님께 무어라고 말씀드리지!” 걱정에, 그날 저녁은 한숨도 못 잤다.

다음 날 아침, 선생님의 물음에 “못가 유… 안된데 유….” 란 말밖에 못 했다.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반원 과반수가 못 간다고 하였으니, 창피할 것도 기가 죽을 일도 아니었다.

날짜는 자꾸만 다가오고 청소 당번이라 남이 있는데, 선생님이 “이득주 이리 와봐….” 하시더니 내 손을 잡으며 “선생님이 수학 여행비 먼저 내줄 테니, 갔다 와서 추수 끝내고 아버지한테 달라고 해서 내….”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그런 방법도 다 있었네!

그날 밤 저녁을 먹고, 논둑에서 베어 온 통통한 햇콩을 까고 계신 엄마한테 “선생님이… 나보고 자꾸 수학여행같이 가자네! 돈은 나중에 추수해서 내도 된대! 나만 그렇게 해준댓어!” ”그려! 선생님이 그렇게 꺼 정 해준다면야 가야지? 고마우신 선생님이시네.”

“알았어! 어떻게 해볼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렇게 해서 참으로 어렵게 수학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어느덧 시골 버스는 뽀얀 흙먼지를 휘날리며 넓은 합덕 들판을 지나 기차역이 있는 신례원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와보는 기차역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 역 근처 여관방에 숙소를 정하고 창경원, 청와대, 연초제조창, 신문사, 남산 등지를 돌아보았는데 이때 큰 사고…. 동생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을 사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엄마가 어렵게 마련해 준 돈 200원이 없었다.

여관방에 들어와 밥도 안 먹고 엉엉 울기만 했다. 담임선생님이 우리 방 아이들을 모아 놓고 “모두 눈 감아… 돈을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손들어, 그러면 용서해 준다.” 했지만 손드는 사람이 없자, 단체 벌로 외출을 금지했다.

“너희들 참 나쁘다.” 하시면서 그날 무척 화를 내셨다. 다음날 새벽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200원을 주시면서 “다 잊어버리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사 먹고 동생들 줄 선물도 사거라.” 하셨다. 그땐 그렇게 고마운 줄도 몰랐었다.

뒤에 곰곰 생각해 보니 친구들이 가져간 게 아니라, 여관 앞에서 뽑.기 장수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아무래도 불량배들한테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다.

‘그때 나 때문에 혼난 친구들아 정말 미안해….’ 그리고 어느덧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작년 말 담임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그 얘기를 꺼냈더니, “기억이 안 난다.” 하셨다.

“감사했던 마음이 얼마나 아련했던지…. 그때 200원이면 정말 큰돈이었다. 담임 선생님 가난한 학창시절 정말 감사했습니다.

 

 

 

김용복 극작가 칼럼니스트  bsjilb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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