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지섭 수필가/칼럼니스트

2016년 8월 세종시 전동면에 전원주택을 소유한 이해찬의원이 지역 농민이 뿌린 퇴비냄새에 항의 민원을 내고, 세종시 고위 간부의 지시로 퇴비가 수거된 사실은 아직까지도 황제민원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으며 당시 야당과 국민의 호된 질책을 받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도 망각의 명약인 세월 앞에 잊혀질 즈음 또다시 장애인 비하 발언이 터졌다. 발단은 이러했다. 2018.12.28. 서울 여의도 중앙 당사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 장애인위원회 발대식 및 임명장 수여식에서 이 대표는 축사에서 “우리나라에는 장애인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옛날 산업화 초기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산재로 인하여 발생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은 아니 제가 말을 잘못 했습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사람들은 정신장애인입니다. 정치권에서 와서 말하는 것을 보면 저게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이 많은데 그 사람들까지 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자유한국당 등 야당들은 장애인을 비하한 발언이라며 일제히 비판하였다.

이 대표는 논란이 확산되자 발언 6시간 만에 “장애인 여러분을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내용의 공식 사과문을 냈다. 이 대표는 “허황된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일부 정치인의 행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있다’는 비유를 들었다며 장애인 여러분을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 그렇다면 이 대표에 대한 비판의 수위와 발언 진의를 한번 반추해 보자.

이 대표가 ‘지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이란 표현은 지체장애인이 한심하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므로 형식적으로 본다면 분명 실수라고 볼 수 있고 비판을 들을 만하다. 여론이나 야당 정치인들은 장애인보다 한심하다는 말은 마음속으로 장애인을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게 들통 난 셈이라고 꼬집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현실생활을 살펴보면 지체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을 불문하고 한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명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지체장애인이 모두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며 활동하는 생활영역에 신체적인 불편이 수반될 뿐이라는 것이 현대인의 일반적인 사고 작용일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사고에 입각할 때 이번 이 대표 발언 파문은 비리나 범죄와 연관되어 있고 정부정책에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일부 야당과 여당 국회의원을 싸잡아 더 한심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지체장애인은 그런 사람들과 비교할 때 한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강조하려다가 부족한 화술의 기교(技巧)로 빚어진 해프닝인 것 같다. 그러한 근거로 그가 두 번째로“정치권에는 저게(저렇게 말하는 것) 제 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들이 많이 있다”고 표현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정신장애인은 ‘지적장애인’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나 또 다른 의미로 비정상적으로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양심불량자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대표가 두 번째로 표현한 내용에서 정신장애인이라는 비유는 누가 보아도 입법활동은 모른 채하며 개인적인 이권과 당리당략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일부 몰지각한 국회의원을 그 공격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이 대표는 김대중 정부 당시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당시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현재까지 다선 국회의원으로서 집권당 대표로 재직중이다.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이 대표는 그 화려한 경력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으로 그의 약점이 노출된 셈이다. 이 대표의 약점을 한 마디로 지적해 본다면 화술의 기교가 그의 능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만일 그가 축사 도중 “그러한 지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은 아니 제가 말을 잘못 했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제가 말을 잘못 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더 한심한 사람들은’이라는 말은 인구에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표현으로 장애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장애인과는 아무 관련없이 ‘몰지각한 일부 국회의원 집단’으로 그 표현의 관련성이 자연스럽게 이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한 지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러한 지체장애인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장애인이 되었건 비장애인이 되었건 모든 사람은 한심한 사람도 있고 똑똑한 사람도 있는 건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이지만 저는 지체장애인보다 훨씬 한심한 정신적 장애인 집단을 알고 있습니다. 정치권에 몸담고 있으면서 폭력을 일삼는 국회의원, 당리당략만을 위하여 정부정책에 반대하면서 장애인 복지실현의 법률 통과를 저지하는 일부 몰지각한 국회의원 집단이 바로 한심한 정신적 장애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결론적으로 이 대표의 ‘장애인 비하 발언’은 장애인의 사기를 진작시켜주려 했던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파문은 잔잔한 물결이었으므로 이 대표가 향후 화술의 기교를 꾸준히 탐구한다면 눌변(訥辯)의 약점을 보완하고 그 탈출구를 찾아내기 위한 도약의 계단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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